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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소설을 더 많이 읽는다는 통계적 근거는 없다. 오히려 전통적 관점에 따르면 여름은 소설 판매율이 떨어지는 계절이라고 한다. 여름엔 떠나야 하고 떠날 땐 책보다 중요한 게 더 많으니까. 그럼에도 여름과 독서가 제법 잘 어울려 보이는 까닭은 뭘까. 매해 여름이면 작가와 매체 들이 앞다투어 ‘휴가철에 읽을 소설’을 추천하는 탓도 있겠고 ‘서머 리딩’이나 ‘비치 리드’ 같은 출판 마케팅의 영향도 있을 것이나, 그보다도 여름 특유의 시간 감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름은 일상의 리듬이 느슨해지고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쉬운 시간이다. 휴가, 여행, 긴 낮과 짧은 밤은 현실의 밀도를 잠시 제쳐두고 그 틈을 이야기로 채우기 좋게 만든다. 와중에 백미는 밤이 짧다는 것이다. 여름의 시간에는 묘한 조급함이 깃들어 있다. 해는 길지만 밤은 금세 지나가고, 그 짧음은 곧 끝나 버릴 것 같은 예감을 남긴다. 이러한 감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오래 지속되기보다 한순간에 소진될 것처럼 느껴진다. “그 여름에만 가능했던 일”이라는 말은 쉽게 추억과 상실의 형태를 띤다. 밝고 뜨거운 계절이라는 조건은 감정을 흐리기보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대비시키고, 그 결과 여름은 다양한 감정들이 짧은 시간 안에 응축되어 드러나는 시기로 남는다.
여름의 기이한 시간성을 보여 주는 소설 2편을 묶었다. 권혜영 작가의 단편소설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는 퇴사 이후 실업급여에 의존해 살아가는 ‘나’의 느슨하고 무중력에 가까운 시간을 따라간다.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지내던 ‘나’는 우연히 희귀 띠부씰을 거래하러 나갔다 아이들이 미끄럼틀 위로 물건을 굴려 보내는 장면을 목격한다. 누구도 타지 않는 미끄럼틀, 대신 쓸모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반복적으로 오르내리는 기묘한 풍경. 그것은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닮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반복 속에서 미묘하게 다른 결과가 발생하는 세계. 무의미하고도 집요한 반복은 여름이라는 계절이 만들어내는 느슨한 시간의 감각과 겹쳐진다.
김혜진 단편소설 「줄넘기」는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뒤 공원을 배회하던 ‘나’가, 매일 같은 자리에서 줄넘기를 하는 노인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는 그 반복은 처음에는 기이하게 보이지만 곧 하나의 리듬이자 세계로 다가온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가벼운 결심으로 시작된 줄넘기는 점차 ‘나’를 반복의 시간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상실은 서서히 다른 형태로 변형된다. 끝날 것을 알면서도 계속되는 반복, 그 안에서만 가능한 변화. 단순한 운동은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작동하며 여름 한가운데에서 경험되는 시간의 방식, 느슨하지만 지속되고 무의미해 보이지만 어딘가로 이행하는 시간을 보여 준다.
여름이 특별히 더 많은 소설을 읽게 되는 계절은 아닐지 몰라도 여름은 확실히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기에는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반복되고 그 반복 속에서 미세한 변화가 발생하는 시간. 목적 없는 움직임, 쓸모없는 행위, 우연한 만남. 모두 여름이라 는 계절이 허락하는 시간의 방식과 닮았다. 두 편의 소설과 함께 천천히 여름을 음미해 보자. 이 소설과 함께라면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은 오렌지빛 해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