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너만은 끝까지 살아서,
네가 원하던 걸 찾을 거야”
3·8 세계 여성의 날에 다시 만나는 정보라의 반제국주의 여성 서사
흰 먼지뿐인 행성에서 붉은 칼을 들고 질주하는 포로 여전사
그녀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제국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언니들이 말했다. 멀리 다른 나라에, 혹은 그보다 더 멀리, 상상할 수 없이 먼 다른 별에 팔려 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녀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유를 준다고 했다.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시도가 실패하면, 그때는 칼이 있었다. 제국인들은 칼을 빼앗지 않았다. 아마 그게 뭔지 몰랐기 때문일 것이다. 제국인들은 매끄러운 붉은 칼집과 그 칼집에 수놓인 형형색색의 무늬들과 그 사이사이에 달린 꽃과 나비와 거울 장식을 보고 그것도 뭔가 여자들이 쓰는 장식품이리라 여겼다. 그 안에 숨은 길고 날렵하고 아름다운 칼날에 대해서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는 칼날을 숨긴 붉은 비단 칼집을 꼭 안고 배에 올랐다. (p. 15)
세계가 사랑하는 작가 정보라의 두 번째 장편소설 《붉은 칼》이 전면 개정되어 출간되었다. 본문 중간중간에 삽입된 별도의 이야기 〈이중나선〉 챕터 중 내용 일부가 추가되어 전체 구성과 배치가 바뀌었으며, 문장도 전반적으로 다시 다듬어졌다. 2025년 영국에서 출간되며 세계 독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시작한 이 책이 2026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기해 한국 독자들과도 다시 만난다.
이 작품의 주인공 ‘그녀(크라스나)’는 자유를 위해 제국의 전쟁에 투입된 식민지 전사다. 전체 구조만 보면 황무지에 떨어져 낯선 동물과 지형을 탐색하고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싸우는 영웅서사의 전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명예를 구하기 위해 칼을 들지 않는다. 오직 살기 위해, 그리고 곁에 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며 고된 여정을 이어갈 뿐이다. 총과 레이저빔이 부딪치는 고도의 기술 전쟁에서, 포로 여성들이 치마를 입고 칼을 든 채 양쪽과 맞서야 하는 상황은 식민지 여성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들은 불가능한 싸움 속에서 최선의 저항으로 작은 승리들을 이루어내며 기존의 남성적 영웅서사를 전복하고 진짜 영웅이 누구인지를 되묻는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자유를 꿈꾸는 식민지 총알받이들의 절박한 싸움
“어차피 돌아갈 집은 없다고 네가 말했잖아?”
“돌아갈 곳이 없다고 자유가 필요 없는 건 아니지.” (p. 222)
어느 외국인 독자분이 이 소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에 끌려간 북한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인지 물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실제 상황의 유사성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한민족이 남의 나라 침략 전쟁에 끌려갔다는 사실도 그렇고, 나선정벌에 동원되었던 함경도 총포수들처럼 또다시 한반도 북쪽 출신 사람들이 남의 전쟁에 투입되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어째서 이런 역사가 자꾸 되풀이되는 걸까. (‘신판 작가의 말’, p. 340)
이 책은 두 개의 부로 나뉘어, 총 열한 개의 본문 챕터와 다섯 개의 〈이중나선〉이라는 특별 챕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나선〉은 소설 속 주요 공간과 등장인물들의 전사가 콜라주처럼 담겨 있어서 본문의 이야기 흐름과 같은 시간선을 공유하지 않는다. 1부에서 ‘그녀’는 장거리 비행 끝에 나무 한 그루 없이 흰 먼지만 가득한 행성에 도착해 흰 피부와 옅은 눈동자를 가진 거대한 체구의 외계인을 적군으로 마주한다. 거듭되는 전투와 행군 과정 속에서 자신이 놓인 공간과 싸우는 대상, 그리고 포로 용병들에게 얽힌 비밀에 점차 접근한다. 2부에서는 죽었다 생각한 연인과 같은 모습의 소년과 재회하게 되면서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전혀 빠져나갈 수 없는 전쟁에 휘말렸음을 직감하게 된다.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진짜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차근차근 접근해가는 과정이 담겼다.
‘나선정벌’은 370여 년 전의 사건이고, 소설 속 세계는 인류가 다양한 종으로 분화하여 우주 전쟁을 일으키는 시기로 상정되어 있으나, ‘작가의 말’ 중 외국인 독자가 발견했듯 독자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현재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고전문학을 읽고서도 수용자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받게 되는 독서의 기본 원리가 작용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힘센 집단이 약한 집단을 침범하고 휘두르려 한 역사가 쳇바퀴처럼 되풀이된 불균형한 세계 탓이기도 하다. 《붉은 칼》은 과학소설과 환상소설을 통해 일그러진 세계의 단면을 개성적으로 재현해온 작가 정보라가 계속되어온 제국주의의 폭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사화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 SF소설이라고도 말해볼 수 있겠다.
싸움터 한복판에서 잡은 손 놓지 않던 기억
자신만의 붉은 칼을 들고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모두에게
함께 살아서 돌아가고 싶었다. 함께 살아남아야 했다……. (p. 137)
처음에 소설을 쓸 때 세월호 1주기에서 경찰 차벽 사이로 보았던 깃발들을 생각했습니다. 까만 밤에 하얀 경찰버스 사이 좁은 틈새로 수많은 깃발이 휘날리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작중에서 배경은 흰색으로 바뀌었지만 색깔 상징의 중요성이나 깃발 색깔의 인상은 최대한 그대로 활용했습니다. (‘작가 인터뷰: 조상의 얼(?)을 이어받은 판타지’ 중에서)
총구 앞에서 칼을 든 채 맞서며, 온몸에는 상처를 입고, 정체 모를 오물을 뒤집어쓰며, 거대한 새 날개 위에서 멀미하고, 끈적한 물속에 빠져 익사할 뻔까지 하는 주인공의 고초는 3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 속에서 다종다양하게 펼쳐진다. 빠져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고통의 한복판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은 어디이고, 자신이 원하는 자유가 어디 있는지를 질문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한순간도 주저하거나 멈추지 않는다. 《로커스 매거진》의 평론가 나이얼 해리슨은 이 소설을 추천하며 “관념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천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라 평하면서, 소설 속 크라스나가 보여주는 “고립과 밀폐의 공포를 돌파하는 필사적 저항”에 주목했다. 이 실천적 저항의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녀’를 움직이는 동력은 강한 생존 의지를 넘어 동료들과 함께 살아서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희망이다. 이것은 작가가 10년이 넘도록 엄동설한의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내리쬐는 태양 아래를 삼보일배로 전진하며, 견고한 차벽 앞에 사람들과 손 붙잡고 맞서 싸운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감각이기도 하다. 우리를 가장 멀고 낯선 세계로 데려가서 오늘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고, 답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게 하면서도 다시 용기를 불어넣는 소설. 그것이 정보라 문학의 힘이자 매력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목차]
제1부
이중나선 1 | 1. 안개 속의 유령들 | 이중나선 2 | 2. 더러운 강 | 3. 이스포베딘 | 이중나선 3 | 4. 새 | 이중나선 4 | 5. 허공의 별들 | 6. 행성의 밤 | 이중나선 5
제2부
7. 소년 | 8. 잠입 | 9. 모선 | 10. 결투 | 11. 자유
구판 작가의 말 | 신판 작가의 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