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한나 아렌트 이전, 가장 먼저 악의 중심에 다가간 남자
미군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켈리가 발견한 악의 실체
1945년 8월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을 점령하고 전범들의 재판 준비를 시작하던 때, 한 장교가 룩셈부르크 몽도르프레뱅의 수용소로 도착한다. 미 육군에서 3년간 근무하며 수천 명의 미군 정신과 진료와 관련된 교육을 총괄했던 더글러스 맥글래션 켈리 대위였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단순했다. “수감자들이 최종 처분을 받을 때까지 재판을 치를 수 있도록, 그들의 정신 상태를 유지시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야심찬 정신과 의사였던 켈리는 한 가지 개인적 목표를 품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일을 저지른 그들의 “공통된 결함, 즉 악행을 서슴지 않는 성향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들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치 정신”이라고 할 만한 악의 본질적 특성이 존재했을까?
러셀 크로우, 라미 말렉 주연의 영화 〈뉘른베르크〉로 영화화된 원작 논픽션인 잭 엘하이의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원제: The Nazi and the Psychiatrist: Hermann Goring, Dr. Douglas M. Kelley, and a Fatal Meeting of Minds at the End of WWII)는 악의 중심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정신과 의사 더글러스 켈리의 이야기를 다룬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양상에 집중한 영화와 달리 책은 켈리가 경험한 헤르만 괴링 등 22명 전범들의 심리와 행동,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집요하게 뒤쫓는다. 또한 영화에서 생략된 국제군사재판 이후 켈리가 경험한 또 다른 악의 모습과 파국적 결말을 추적하며 지금 우리 시대에 다시금 되새겨야 할 악에 대한 한 관점과 그 파괴적 일상성을 인상적으로 제시한다.
저자 잭 엘하이는 스미스소니언, 더 애틀랜틱, GQ, 와이어드, 워싱턴 포스트 매거진 등 다수의 매체에 글을 기고해 왔으며 의학, 역사, 과학 등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탁월한 논픽션 글쓰기로 로스 의학 저널리즘 기념상, 미국 언론인 및 작가 협회 우수 기사상, 맥나이트 펠로우십, 미네소타 북 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저자는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를 쓰기 위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뉘른베르크 재판과 켈리에 대한 다수의 새로운 자료를 활용했다. 특히 나치 피고인들의 의료 기록을 활용한 것은 이 책이 최초의 사례다. 더불어 저자는 켈리의 아들 더글러스 켈리 주니어의 개인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재판 이후 유명한 정신과 의사로서 켈리의 끔찍한 삶, 뉘른베르크에 흘렀던 광기와 죽음의 전조를 독자가 그 공기까지 느낄 수 있도록 생생하게 되살린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완벽한 재현,
압도적인 현장감과 사실적 묘사로 되살아난 나치 전범들의 초상
더글러스 켈리의 뉘른베르크 전범 연구를 다룬 것은 이 책이 처음은 아니다. 수많은 정신의학·뇌과학·심리학 전문가들과 저작들이 켈리가 발견한 악의 일면에 대해 탐구했다. 켈리의 보좌관을 맡았던 심리학자 구스타브 길버트 그리고 후임으로 복무한 의사 레온 골든손의 당시 자료들도 수없이 많이 검토되었다. 하지만 어떤 연구자나 책도 20세기 최악의 전범들을 이토록 철저히 현장의 시선으로 바라보지는 못했다.
잭 엘하이의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역사적 자료와 추가로 입수한 문서들을 바탕으로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뉘른베르크의 전범들과 켈리의 삶에서 결정적 장면들을 서술한다. 엄밀한 역사적 사실을 집요할 정도로 빈틈없이 인용하면서도 장면마다 적재적소에 스토리텔링을 활용해 이야기 흐름을 살렸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압도적인 현장감과 사실성으로 한 세기 전 끔찍한 악의 정신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 책의 장점이 가장 빛을 발하는 대목은 바로 나치 전범들의 묘사일 것이다. 데칼코마니 형태의 잉크 반점을 활용해 심리를 진단하는 로르샤흐 검사부터 국제군사재판 전개 과정까지, 나치 전범들의 인간상은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루프트바페 창설자이자 나치 독일의 이인자였던 헤르만 괴링은 뉘른베르크라는 역사적 무대에서 카리스마를 드러내고 켈리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친 존재로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헤르만 괴링을 무능력한 히틀러의 예스맨이나 약물 중독에 시달리며 허영심에 가득 찬 자기 과시적 인물로 바라보곤 한다. 하지만 책은 켈리가 마주한 전혀 다른 모습의 괴링에 주목한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준비하던 괴링은 중추신경 억제제인 파라코데인 복용을 중단하고, 불어난 체중을 감량하면서 과거 나치 독일의 영웅적 면모를 회복한다. 그래서 전범들에게 공통된 나치 정신을 확인하려 한 켈리에게 괴링은 가장 큰 난제가 된다. 뉘른베르크의 괴링은 비록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지만 악마적 존재가 아닌 “최고 수준에 달하는 뛰어난 지능”을 갖춘 인물이자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켈리가 바라본 괴링과 주요 전범들의 모습을 지금 여기로 구현해 냄으로써 그가 마주한 딜레마를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결과적으로 읽는 이는 켈리의 결론 “히틀러가 없으면 이 사람들은 비정상도 아니고 변태도 아니며, 그렇다고 천재도 아닙니다. 이들은 공격적이고 영리하고 야심 차고 냉혹한, 여느 사업가와 다를 바 없죠.”를 깊이 숙고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책은 독자들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이라는 표본을 확장해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악의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시체를 밟고서라도 오르려는 자”
악은 누구인가, 어디에 존재하는가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이후 더글러스 켈리의 악에 대한 이론과 주장도 상세히 소개한다. 켈리가 발견한 악의 실체는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분석한 후,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악의 평범성은 상부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따르는 인간의 사유 부재와 수동성을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켈리는 전범들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자기 환경을 만들어 낸 존재였다”라고 주장했다. 즉 권력을 쥐고 싶어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붓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이용하는 존재라면 모두가 나치 전범과 다름없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켈리는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수많은 강연에서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최고위 나치들이 끔찍한 행위를 자행하고 묵인하도록 이끈 자질은 세계 곳곳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안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책은 켈리의 주장에 전적으로 수긍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뉘른베르크 이후 범죄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고 정력적으로 활동한 켈리의 마지막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 그의 주장을 다시 한번 되새기도록 이끈다. 저자 잭 엘하이는 켈리의 아들 더글러스 켈리 주니어와의 인터뷰를 통해 켈리의 뉘른베르크 이후의 행보를 집요하게 뒤쫓았다. 이 과정에서 괴링과 켈리의 삶은 일종의 데칼코마니 한 쌍처럼 그려진다. 괴링이 뉘른베르크에서 집행을 앞두고 숨겨둔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자 켈리는 괴링이 연합국을 속인 것이라 말하며 “그의 자살은 노련하면서도 심지어 눈부시다고까지 할 만한 마무리로서 훗날 독일인들이 숭배할 법한 일종의 기념비를 완성한 것”이라는 평을 남긴다.
어쩌면 짧은 만남 동안 괴링에 매료된 것처럼 보이는 켈리의 반응들에서 저자는 두 사람 정신 안에 자리하고 있는 유사성을 발견한다. 괴링이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것처럼, 켈리의 삶 그리고 그의 외가인 맥글래션 가문의 역사 속에서도 흐르는 야심과 과도한 열정을 발견할 수 있다. 책은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수많은 업무에 집중한 켈리의 가혹할 정도의 야망과 노력을 조명하면서 폭주하는 켈리의 성취 지향이 어떻게 그 가족에게 폭력적 영향을 끼쳤는지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밝혀지는 괴링의 마지막을 상기시키는 켈리의 파국적인 선택은 켈리 자신이 주장했던 악의 실체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려준다.
『뉘른베르크, 나치와 정신과 의사』는 1946년 뉘른베르크의 시공간을 넘어 독자들에게 여전히 퇴색하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책의 저자가 강조하듯이 “권위는 언제나 사악”하다. 그리고 그 악은 적에게서든 우리 자신에게서든 그리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악을 경계해야 할까? 책은 켈리의 강연 내용 중 다음과 같은 장문의 글을 인용한다. “여러분은 그런 이들이 여기에는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미국에도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들은 나머지 절반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미국인 절반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기꺼이 그 자리에 오르려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오늘도 민주주의의 권리를 반민주적으로 이용하며 떠들어 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타인을 짓밟고 끝없이 위를 향하는 악은 누구일까? 우리 자신일까? 이 역사적인 질문의 답은 책을 읽는 독자들의 몫이다.
[목차]
추천의 글 · 004
주요 인물 · 008
1장 집 · 010
2장 몽도르프레뱅 · 014
3장 정신과 의사 · 042
4장 폐허 속에서 · 072
5장 잉크 반점 · 104
6장 침입자 · 144
7장 정의궁 · 172
8장 나치 정신 · 212
9장 청산가리 · 246
10장 사후 진단 · 288
감사의 말 · 304
옮긴이의 글 · 308
참고문헌 · 316
찾아보기 · 3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