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지난 7월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 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 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한 다음,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해 독자들에게 선보이고자 한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길 계획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타계 1주기에 맞추어 특별히 먼저 출간한 최인훈 중단편선 『달과 소년병』 외에,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의 중단편선이 1차분으로 출간되었다. 이어서 2차분으로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인 오정희, 박완서의 중단편선을 내년 1월 선보일 예정이다.
책 속에서
나는 참 불행한 놈이다. 절망. 풀 수 없는 오해들. 다스릴 수 없는 기만들. 그렇다고 장난꾸러기 같은 미래를 빤히 내다보면서도 눈감아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절망. 절망. 누나와 나는 그다음 날 저녁, 등대가 있는 낭떠러지에서 밤 파도가 으르릉대는 해변으로 형을 떠밀었다. 우리는 결국 형 쪽을 택한 것이었다. 미친 듯이 뛰어서 돌아오는 우리의 귓전에서 갯바람이 윙윙댔다. 얼마든지 형을, 어머니를 그리고 우리들을 저주해도 모자랐다. 집으로 돌아와서 불을 켜자 비로소 야릇한 평안을 맛볼 수 있었다.
「생명연습」(p. 39)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무진기행」(p. 139)
염소는 힘이 세다. 염소는 죽어서도 힘이 세다. 가마솥 속에서 끓여지는 염소도 힘이 세다. 수염이 시커멓고 살갗이 시커멓고 가슴이 떡 벌어졌고 키가 크고 손이 큰 남자들도 가마솥 속의 염소에게 끌려서 우리 집으로 들어온다. 염소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람만 일부러 골라서 우리 집으로 끌어들일 만큼 힘이 세다.
「염소는 힘이 세다」(p. 185)
[목차]
생명연습 | 역사力士 |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 무진기행 | 서울 1964년 겨울 | 염소는 힘이 세다 | 환상수첩 | 다산성
해제 | 강요당한 선택·김형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