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귀가 당나귀처럼 커졌어!”
작가 노인경의 언어와 유희의 감각으로 새롭게 해석된 옛이야기 그림책
세상을 다 가진 듯했던 444대 왕의 기쁨은 아쉽게도 하루를 채 가지 못했다.
왕궁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귀가 당나귀처럼 커져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왕은 급히 복두장을 불러 커다란 왕관을 주문하지만 무거운 왕관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꾸 아픈 몸을 이끌고 끙끙 앓던 444대 왕은 문득 이전 왕들의 일기를 떠올리고 기록들을 읽어내려간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방식으로 작가가 선택한 재료는 다름 아닌 ‘패턴'이다.
반복과 변주, 생략과 과장의 적절한 운용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리듬감으로 인해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루할 틈 없이 즐겁다.
누구보다 강인했던 1대 왕은 왕관이 너무 커서 고꾸라져 죽었고, 몸이 원체 허약했던 126대 왕은 왕관의 무게 때문에 허리가 휘어 죽었고,
활발했던 157대 왕은 왕관이 떨어지는 바람에 새끼발가락 뼈가 부러져 죽었다.
경쾌한 주황 별색과 패턴의 단순함은 ‘죽음'이라는 단어의 무게보다는 왕들의 가지각색 성격과 다음 장면을 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후반부의 팝업 장치와, 펼침을 고려해 제작한 사철누드제본, 본문을 하드커버의 한쪽 면에만 부착한 독특한 장정은
책을 경험하는 독자의 디테일한 감각을 충만하게 만족시켜 준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수많은 왕들의 죽음이 던지는 삶에 대한 질문
늠름했던 212대 왕은 수치심 때문에, 눈물이 많았던 256대 왕은 슬픔에 빠져서,
학구적이었던 367대 왕은 당나귀 귀의 원인을 찾지 못해 기가 막혀 죽었다는 대목에 이르면 다음 왕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었을지 궁금해진다.
갑자기 맞닥뜨린 사건 앞에서 지난 왕들이 겪게 되는 모두 다른 고뇌와 사건들에 대해 읽어내려가다가, 444대 왕은 마침내 결심한다.
이 커다란 왕관을 벗어놓기로.
왜 나에게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일을 누군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질문은 이깟 귀 때문에 죽을 수는 없다는 답에 도착한 것이다.
누구나 남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감추고만 싶은 그 모습을 긍정하고, 마침내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의 씨앗 역시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말해 준다.
옛이야기가 펼쳐 놓은 너른 들판, 어린이도 어른도 즐길 수 있는 이야기
풍부한 상징과 함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다양한 질문들을 담고 있는 ‘옛이야기'에서 출발한 그림책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어린이 독자도 어른 독자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거닐 수 있는 너른 들판 같은 이야기이다.
작가 노인경은 그동안의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충분히 탐색하는 것, 그 모습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을 바탕으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의 기쁨과 감동에 대해 꾸준하게 이야기해 왔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역시 진실한 메시지를 향한 끊임없는 사색과 더 즐거운 시각적 실험을 향한 힘찬 모색의 과정 속에서 탄생한 최신의 그림책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