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파멸과 종말이 다가온다는 공포 속
농담처럼 등장하는 아이러니
《헤르쉬트 07769》는 독일 튀링겐의 어느 가상의 마을 카나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삶과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재앙의 또 다른 모습을 그려낸다.
이 작품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암울하지만, 중간중간 농담처럼 아이러니가 등장한다. 우선 주인공의 성인 ‘헤르쉬트’는 ‘통치와 지배’를 뜻한다. 주인공 헤르쉬트 플로리안은 도무지 그 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보스’에게 완벽히 종속되어 그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네 바보’ 같은 존재인 플로리안은 전반적으로 모자란 면모를 지닌다. 힘이 엄청나게 세지만 온순한 덕분에,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을 돕게 하고는 밥을 주거나 용돈을 주며 챙겨준다. 마을의 나이 든 여인들은 플로리안의 이야기를 묻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혹시나 그가 나쁜 일에 휘말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런데도 플로리안은 쾰러 씨의 물리학 수업을 듣고 이해할 만큼 영특하기도 해서,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 문제에 집착하면서 사회가 붕괴할 것이라는 우주론적 예측에 함몰된다. 그의 영특함과 모자람은 순수함과 얽혀, 끊임없이 메르켈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총리가 자신의 편지를 읽으면 반드시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해주리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이렇듯 소설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플로리안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스는 청소 회사를 운영하는데, 그들의 슬로건은 “Alles Wird Rein”, 즉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다. 독일어인 ‘rein’은 ‘깨끗하다’라는 뜻이 있지만, ‘순수하다’라는 뜻도 있다. 이 단어는 인종차별과 학살의 배경이 된 독일 ‘순수’ 혈통이라는 나치의 착각과 연결된다. 그리고 보스는 이를 ‘독일 정신’이라는 명분으로 플로리안에게 주입한다. 작품에서는 바흐와 관련된 장소에서 일어난 ‘늑대 머리’ 그래피티 사건 이후로 보스가 일으킨 일종의 인종 청소와 다시금 연관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스의 청소는 깨끗하지 못하고, 순수하지도 않다.
또한 갑작스레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늑대’,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치매에 걸려 결국 세상을 떠나는 ‘쾰러’ 등의 상징은 비극을 더욱 첨예하게 만든다.
작품을 관통하는 여러 가지 메타포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오히려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장치로도 작용한다.
바흐와 더불어
또다시 종말은 계속된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작품에서 바흐 음악은 자주 묵시록적 공포와 예술의 힘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요소로 활용되곤 한다. 바흐의 음악은 화성학적 완벽을 추구하는 만큼, 예술적일 뿐 아니라 수학적으로도 아름답다. 그런 면에서 음악과 예술, 수학에 천착하는 바흐의 음악을 바탕으로 작가는 예술과 인간, 사회 구조의 본질을 탐구한다. 한국어판으로는 600쪽이 넘는 소설이 한 문장으로 연결되는데, 반복과 변주를 통해 긴장감을 주고 이를 해소하는 바흐의 푸가 구조가 문학적으로 구현된다.
《헤르쉬트 07769》에서 가상의 마을 카나(우편번호 07769)는 바흐가 태어났다고 하는 튀링겐과 연결되고 바흐의 음악이 끊임없이 배경에 흐른다. 처음에는 여러 곡이 흐르지만, 나중에는 한 곡만이 집요하게 플레이된다. 헤르쉬트 플로리안이 집착하는 물리학적 종말론, 네오나치 집단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바흐의 음악은 인간 정신이 추구하는 질서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는 혼돈 속에서도 예술이 초월적 질서를 제공한다는 방증이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보스’는 바흐 마니아로, 광신에 가까울 만큼 바흐를 신봉한다. 바흐의 음악은 예술을 넘어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기존 권위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바흐의 음악을 제대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단을 꾸릴 정도다. 그래서 바흐의 기념물에 ‘늑대 머리’와 ‘우리’를 낙서하는 스프레이어(그래피티 아티스트)를 잡으려는 그의 집념은 네오나치의 폭력성으로 연결된다.
작품은 헝가리 체제의 불안감을 드러내면서, 극우파, 네오나치주의에 대한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불안과 두려움을 그려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나치와 연관된 모든 일이 헝가리에는 아픈 상처이자 악몽이었다. 크러스너호르커이도 유대계인데, 그 사실을 아버지가 뒤늦게야 알려줬다고 할 만큼 나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죽음과 폭력의 주체이자 피해자로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헝가리인에게, 다시금 등장한 네오나치주의는 악몽 그 자체일 것이다. 그렇기에 플로리안이 보스를 죽이고 떠돌다가 늑대 밥이 되고 마는 그 모든 비극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목차]
무 안에서 무가 나오는데 15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58
세상이 사라지고 있는데, 135
베를린의 침묵 173
유일하게 전한 메시지는 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212
바흐와 관련이 되면 모든 것이 쉽지 않다 228
깊은 위안을 주는 239
솟아오르게 듬뿍 담아주었다 315
위대함을 가까이 344
완벽한 것은 없다, 다만 436
그리고 하늘색 471
완벽한 허공 속으로 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