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일상적 사물과 공간이라는
보편적 소재에 녹여 낸 사회적 통찰
뒷마당에 서 있는 자전거, 신발장 한편에 놓인 지팡이, 상자 안에서 오래 잠자고 있던 낡은 편지…. 고요한 일상에 존재감 없이 있던 ‘사물’들이 어느 날 문득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익숙하게 드나들던 동네의 식당, 공원, 기차역과 같은 장소들이 다른 낯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다. 낯설게 다가온 대상들은 기억 저편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가족과 함께 영국에 살고 있는 이향규는 이번 책에서 그러한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일상적인 물건과 시공간을 통해 세계를 바라본 것이다. 자신을 향했던 저자의 시선은 매일 마주하는 가족에게로(1부. 식탁 위의 얼굴), 이웃에게로(2부. 울타리 너머의 얼굴), 영국 사회와 바다 건너 한국으로(3부. 길 건너의 얼굴) 옮겨 간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는 타인에게 선함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들, 드러나지 않은 채 사회의 빈 고리를 연결하는 사람들이 서 있다.
이를테면 작가의 남편이 늘 지니는 파란색 ‘팔찌’는 자신에게 파킨슨병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 느린 속도를 양해 구하기 위한 표식이다. 저자는 남편의 ‘사물’을 응시하며 세상에는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노라 고백한다. 또 영국의 자선 가게인 ‘채리티 숍’과 마을 회관 역할을 하는 ‘펍’을 소개한다. 저자는 처음 영국으로 이주하고 외롭고 가난했던 시절에 두 곳에서는 유일하게 잠시나마 안심하고 머물렀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러한 이웃 간의 관심이 사회의 빈틈을 채워 준다고 넌지시 말한다.
이 책은 거시적인 사건 속에 가려진 개인의 비극 또한 다룬다. 열아홉 살이 되어 둥지를 떠날 준비를 하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같은 나이에 한국 전쟁에 참전해야 했던 브라이언 호프 씨와의 만남을 떠올린다. 전쟁에서 씻지 못할 상처를 입은 호프 씨가 전우들을 잊지 않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전국 지역 신문사들을 통해 그들의 ‘사진’을 찾는 노고를 행한 사실을 전한다. 저자는 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함으로써 역사의 상흔을 입은 개인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불러일으킨다.
소박한 언어와 행간에 녹아든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
이향규는 오랜 시간 다문화 청소년과 탈북 이주민, 결혼 이주 여성을 돕고 이에 관한 연구를 해 왔다. 그리고 몇 해 전, 남편의 파킨슨병 발병으로 그의 나라인 영국으로 이주하며 스스로 ‘이주민’이자 ‘소수자’의 삶을 살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매체에 칼럼을 써 오고 있다.
저자의 전작들은 주로 사회적 이슈에 대한 탐구이자 기록이었다. 첫 번째 에세이 『후아유』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담았고, 두 번째 에세이 『세상이 멈추자 당신이 보였다』에서는 팬데믹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평범한 소시민들이 이룬 단단한 성장을 기록하였다. 이렇게 꾸준히 약자들이 빚어내는 연대의 의미에 집중해 온 것이 기회가 되어 홈리스를 후원하는 잡지 『빅이슈』에 ‘사물과 사람’이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연재하게 되었다. 이 원고를 바탕으로 하되 대폭적인 수정과 보강을 거쳐 세 번째 에세이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는 과정에서 저자 마음 깊숙이에 자리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
저자는 일상의 익숙한 물건과 장소, 시기를 통로 삼아 ‘지금의 이향규’를 만들어 준 인연들과의 구체적 추억을 소환했지만, 장애인 인권, 돌봄 노동, 남북 분단, 전쟁의 비극, 비거니즘, 동물권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저자의 사유 또한 자연스레 드러난다. 주변으로 관심을 돌려 일상을 관찰할 때조차도 사회의 응달에 주목하는 이향규 특유의 시선이 돋보인다. 이렇게 독자는 사물에 얽힌 저자의 과거 기억을 따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다 보면 우리 눈에 미처 보이지 않았던 사실, 곧 우리 이웃들이 어떻게 서로를 보살피고 공동체의 든든하게 결속시키고 있었는지 비로소 보이게 된다. 이 점에서 『사물에 대해 쓰려 했지만』은 사회적 목소리가 담긴 에세이를 기다려 온 독자들에게도 울림 있는 읽기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다는
당연한 진실이 주는 안전함과 온기
이 책은 화려한 문체나 박진감 있는 일화를 보여 주며 독자의 시선을 끌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러나 읽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여백 속에 잠시 멈춰 서서 잠시 나의 ‘사물’과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 같은 매력을 지녔다. 이향규의 힘은 거기에 있다. 그리고 글을 통해 독자 아주 가까이 다가가 독자 자기의 이야기처럼 느끼게끔, 그리하여 에세이를 읽는 시간이 독자 스스로와 마주하는 기회가 되도록 이끈다. 분명 타인의 글을 읽었는데,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욱 잘 알고 가까워지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독자가 우리 주위를 둘러싼 부모님, 배우자, 자녀, 친구, 옛 동료, 이웃 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응시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크고 작은 희생과 실천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사회의 빈틈을 채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 결과 독자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무수한 익명의 존재를 깨닫고, 타인과 연결되는 삶이야말로 든든하고 안전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웃과 공동체, 사회의 소박한 연대가 가진 힘을 전하는 이 책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목차]
prologue. 기억 끝에 떠오른 얼굴
1부. 식탁 위의 얼굴
위로 음식-나는 혼자가 아니다
팔찌-우리는 서로 다른 속도로 걷는다
지팡이-비로소 보이는 사람들
자전거-‘혼자’와 ‘같이’라는 두 바퀴
도토리-가장 좋아하는___
어드벤트 캘린더-시간은 뚜벅뚜벅 걸어간다
편지-분주한 벗에게
수선화-마지막 순간, 또는 과정
노래-누군가를 영원히 기억하는 방법
생명의 나무-세상으로 나갈 너에게 주는 선물
전조등-밤길 운전에서 필요한 것
차례상-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렴
2부. 울타리 너머의 얼굴
빨래-햇볕과 바람의 형태
반닫이-옛 주인의 흔적
모자-밀리너 엄마
등산화-봄이 왔다
채리티 숍-누구나 집 한 칸은 필요하다
펍-영국식 마을 회관
명절 음식-여느 평범한 날
황금 지붕-문화재의 진짜 주인
김치-통에 가득 담긴 마음
단체 대화방-휴대 전화 속 이웃
3부. 길 건너의 얼굴
생크추어리-상처 입은 존재들의 거처
하인즈 토마토 크림수프-나를 알게 해 주는 친구
시계-돌봄의 가치
공동묘지-죽음을 기억하라
잡지-사물의 여행
사진-얼굴을 찾아 주는 일
1997년 달력-꽃다운 벗에게
코리안-우리의 언어
깍두기-잉여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기차-함께 여행하는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