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소중한 사람을 잃고 멈춰버린 일상
그 끝에서 열린 새로운 세계
“오노데라 씨. 혹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한 번 더 말할게요. 하루히코가 죽었어요. 아직 스물아홉 살인데. 하루히코는 일부러 유언장을 준비해서, 오노데라 씨에게 자기 재산을 나눠주겠다는 의사를 남겼어요. 그러니까 이건 당신을 위한 하루히코의 인생 마지막 진심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걸 필요 없다고 하다니, 실례지만 당신, 몸속에 모스그린이나 코발트블루 색깔 피가 흐르는 거 아니에요?” _18쪽
사십대 여성 가오루코는 남동생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일상이 무너진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흔적이 없어 원인 불명의 돌연사로 판정되지만, 젊은 나이에 유언장을 써뒀다는 사실은 끝내 의문으로 남는다.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가오루코는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전 여자 친구 세쓰나를 찾아간다. 어렵게 마주한 세쓰나는 매정한 태도로 부탁을 거절하고,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팽팽하게 충돌한다. 그러나 세쓰나가 정성껏 차려낸 요리 한 그릇을 계기로 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다. 그렇게 절대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생활의 작은 반경을 정돈하는 일은
어떻게 나와 타인의 마음을 구원하는가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카프네’의 시간
“집은 청소해도 금방 지저분해지고 음식도 먹으면 사라지죠. 그래도 괜찮아요. 고작 이삼일 정도라도 평소보다 집이 지내기 편해지고, 애써 뭘 만들지 않아도 이미 맛있는 밥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 환경만 있다면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어요. 살아가기 위해 행동할 기력을 가질 수 있어요. 이게 카프네를 시작한 이유예요.” _103쪽
가오루코와 세쓰나는 가사 대행 회사 ‘카프네’에서 각각 청소와 요리를 맡아 파트너로 일하며 의뢰인의 집을 찾아간다. 그들이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어질러진 방이 아닌,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투영된 공간이다. 아픈 가족을 간호하거나 독박 육아를 떠안는 등 제각각 사연을 지닌 의뢰인들은 혼자 버티다 스스로 지쳤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 이들이다. 방치된 집안일과 텅 빈 냉장고는 ‘생활이라는 싸움’을 견뎌온 현대인의 피로와 고독을 드러낸다. 두 사람은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묵묵히 방을 정리하고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마련해준다. 이 작은 개입은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회복의 시간이 된다.
“그러면 세상 풍파를 극복하기 위해 일단 배를 채우죠.”
영혼을 위로하는 영양가 있는 음식들의 향연
꼭대기에 올라간 딸기는 마지막 즐거움을 위해 남겨두고, 하얀 크림과 스펀지케이크가 이루는 완만한 언덕에 살짝 스푼을 넣었다. 수맥을 찾은 것처럼 농염한 초콜릿 소스가 쏟아져나와 가슴이 뛰었다. 그래, 이 파르페를 본 순간부터 계속 두근거렸다. 초콜릿 소스가 묻은 크림과 스펀지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다. 술 이외에는 전부 싫다고 생각했는데, 풍성한 단맛이 입안에 퍼진 순간, 몸 안의 세포가 되살아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_83~84쪽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다채로운 음식들이다. 세쓰나는 각자의 사정에 맞는 메뉴를 선정해 요리한다. 냉장고에 남은 재료로 만든 딸기 파르페, 맥주인 척하는 사과 주스, 달걀 된장과 주먹밥, 무지개색 피자 등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저자 아베 아키코의 감각적이고 위트 있는 묘사는 음식의 맛은 물론, 그것을 마주한 인물의 감정까지 생생하게 그려낸다. 식사를 나누는 장면은 식탁이 ‘먹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자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 속 음식들은 도서에 수록된 《카프네》 초간단 레시피 책자를 통해서도 만나볼 수 있다.
우리는 가족도 연인도 친구도 아니지만 함께 맛있는 밥을 먹자
관계의 지평을 열어 우리의 내일을 긍정하는 소설
“아니야…… 오늘은 그거 말고, 저기, 나랑 네가 먹고 싶은 걸 먹자.”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하루히코도 없고 기미타카도 없다. 그래도 좋은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만은 아닌, 앞으로의 내 인생을. _225쪽
한편 이야기의 이면에는 남동생 하루히코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남아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가 남긴 유언의 뜻은 무엇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드러나는 진실은 가족과 타인, 그리고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의 의미를 물으며 독자를 예상 밖의 결말로 이끈다. 이 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기존의 가족이나 연인이라는 범주를 벗어나, 두 여성이 서로를 향해 쌓아가는 유연하고도 단단한 신뢰다. 이들의 낯설고도 다정한 연대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그려낸다.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겨주는 행위’라는 제목의 뜻처럼, 《카프네》는 다정한 접촉과 사소한 돌봄이 오늘을 살아내는 가장 강력한 실천임을 보여준다. 웅크린 몸에 기지개를 켜듯 “내일도 살고 싶다”는 상쾌한 마음을 건네는 소설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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