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추천사
이십여 년 만에 『나목』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의 뜨거움과 거침없음에 놀랐고, 이 작품이 오십여 년 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작가에 의해 분명한 생명을 부여받은 작품은 결코 시간에 따라 낡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을 『나목』은 증명한다.
1932년생 주인공의 복잡한 내면을 따라가는 동안 나는 그녀의 분노와 절망, 질긴 미움과 복수심, 우울과 죽음에 대한 끌림, 삶에 대한 미칠 듯한 갈망을 가슴으로 느꼈다. 끝이 없을 듯한 시대의 어두움과 뜨겁게 타오르는 인물의 대비가 두려울 정도로 강렬했다.
- 최은영 (작가)
작가에게 어떤 작품은 인장처럼 남아 평생을 함께한다. 내게는 『나목』이 그런 작품이다. 한국 전쟁 시기의 스산한 서울, 완구점 좌판에서 “만화적인 얼굴”로 “무료하게” 서 있다 풀리는 태엽을 따라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는 『나목』 속 침팬지 인형은 소설이 무엇인지 채 알기도 전에 나를 사로잡았다. 조잡한 플라스틱 장난감에게서 잿빛 도시를 흔드는 ‘균열’을 발견해내는 것이 작가의 눈이라고 알려준 것이다.
- 김금희 (소설가)
책 속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은 그 회색빛 고집이었다. 마지못해 죽지 못해 살고 있노라는 생활 태도에서 추호도 물러서려 들지 않는 그 무섭도록 딴딴한 고집. 나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사는 것을 재미나 하고픈, 다채로운 욕망들은 이 완강한 고집 앞에 지쳐가고 있었다.
--- p.18
문득 나는 내가 전에 애송한 시의 구절을 생각해내려고 골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남의 흉내, 빌려온 느낌은 그것을 깨닫자 흥을 잃고 싱거워졌다. 그리고 가식 없는 나의 것만이 남았다. 그것은 무섭다는 생각과 춥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것만이 온전한 나의 것이었고 그 느낌들은 절실하고도 세찼다. 나는 어두운 길을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무섭다’를 거푸 뇌까리며 ‘무섭다’ ‘춥다’에 떠밀리듯이 달음질쳤다.
--- pp.33~34
피로와 상심이 짙게 밴 음성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난 뭐라고 대꾸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피곤과 상심은 남의 어설픈 헤아림이나 보살핌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어쩔 수 없는, 그만의 것 ?체취 같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북녘 하늘에서 포성이 은은히 울렸다. 두려움과 기대 같은 것으로 가슴이 울렁거려왔다.
나는 승전이고 휴전이고 간에 평화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다만 전쟁이 밀물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일만이 앞으로 수없이 되풀이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 p.46
어느 틈에 내 옆자리로 옮겨 앉은 그녀는 내 등을 정답게 감싸며 바로 귓전에 따뜻한 입김으로 속삭였다. 들꽃과 갓난 야생동물을 합친 것 같은 그녀의 독특한 체취가 풍겨왔다. 그녀가 자신이 시궁창에서도 이처럼 향기롭다는 걸 모르다니 참 답답하다. 그녀가 서 있는 땅이 시궁창이라면 내가 서 있는 땅은 지독한 한발의 땅이다. 그렇지만 그 한발의 의미를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한다? 차라리 영어로 시조를 해설하는 것이 수월할 것 같다.
남의 일로 힘들이고 난처해하기는 정말 싫었다. 나는 시치미를 떼기로 작정했다.
--- p.164
나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당신의 부인은 참 아름답군요?” “그녀의 눈은 무슨 빛인가요?” “그녀의 머리색은요?” 다행히 그 말은 아주 작은 웅얼거림에 그쳤다. 아무리 작아도 내가 오늘 입 밖에 낸 최초의 우리말, 그러나 그것은 우리말이었을 뿐 결코 내 말은 아니었다. 나의 느낌, 내 의사가 담긴 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말이 아니라 외침에라도 몸짓에라도 정말 나를 담고 싶었다.
--- p.166
눈가의 눈물을 닦고 사람들이 흩어지고 새 사람이 오고 하는데 나는 그저 망연히 서 있었다. 머리가 텅 빈 채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내가 쓰러지지도, 땅으로 흘러내리지도 않고 서 있을 수 있음은 누군가의 부축 때문인 것을 깨달았다. 그의 부축은 능숙하고 편안했다. 찬란한 빛처럼 어떤 예감이 왔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오래도록 그 예감만을 즐겼다.
--- pp.168~169
나는 그녀에게 맹렬한 적의를 느꼈다. 미움으로 가슴속의 온갖 것들이 사납게 꿈틀대더니, 드디어 미움이 팽팽하게 온몸에 충만했다. 나는 그녀에 대한 내 증오에 만족했다. 비로소 그녀에 대한 내 감정이 선명해진 셈이니까. 그리고 나는 남을 미워한다는 게 이다지도 흐뭇하고 기분 좋은 것인 줄을 처음 깨달았다.
--- p.329
나는 내 허물을 딴 핑계들과 더불어 나누어 갖기를, 나아가서는 내가 지은 허물만큼 그동안 나도 충분히 괴로워했다고 믿고 싶었다. 우상 앞에서 한껏 우매하고 위축됐던 나는 진상 앞에서 좀 더 여유 있고 교활했다. 나는 오빠들의 죽음에 나 말고 좀 더 딴 핑계를 대기로 했다. 그리고 나에겐 좀 더 관대하기로. 관대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미덕일까.
--- p.331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 p.391
[목차]
작가의 말
나목
작품해설
전쟁상태적 신체의 탄생, 혹은 점령당한 영혼에 관한 보고서 _권명아(문학평론가, 동아대학교 교수)
헌사
그 거대한 빛, 속삭임, 아우성 _김금희(소설가)
멀고도 깊은 곳에서 _최은영(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