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일까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당신을 향해 편지를 쓰는 것이다, 그리움도 애틋함도 없이. 당신을 되살린 후, 다시 죽이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딛고 세계를 구성하는 작가 아니 에르노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을 마주하는 작품 <다른 딸>이 출간되었다. 작가가 1984년 르노드 상을 받았던 <남자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삶을,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한 여자>에서 어머니의 인생을 기록하였다면, <다른 딸>이 천착하는 대상은 ‘당신’, 아니 에르노가 태어나기 2년 전에 죽은 언니 지네트이다.
Nil 출판사의 편지 시리즈 기획(‘Les Affranchis’)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한 <다른 딸>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편지를 써달라는 출판사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하여 시작되는 이 편지는 아니 에르노 특유의 아름다운 칼날 같은 문체를 통해 우아한 유속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나의 흔적에 얹힌’ 당신을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으로 죽은 언니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촉발된 어린아이의 불안과 혼란, 부재와 존재의 탐구, 그리고 마침내 ‘당신’에 대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온전한 ‘나’로 향하고자 하는 여정이 모두 여기, 이 물결에 스며있다.
"나의 위치가 일순간에 바뀌었으니까요.
부모님과 나 사이에 이제 당신이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사랑스러운 당신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가 고유한 존재이기를 희망한다. 그렇기에 열 살의 어느 여름, 작가가 우연히 듣게 된 죽은 언니의 존재는 영영 그를 사로잡는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기에 삶의 궤적이 겹친 적은 없었으나, 분명히 ‘나’를 선행한 ‘당신’이 존재했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탄생의 순간부터 ‘당신’의 그림자가 겹쳐진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어린 ‘나’의 고유성을 훼손당하는 충격적인 경험이다.
마주한 진실은 ‘나’를 딸(One)이 아니라, 다른 딸(The other)의 지위로 밀려나게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착한 성녀로 죽어버린 언니는 가족들의 절대적인 비밀 속에서 ‘완전히 닫혀버린 이야기’가 되고, ‘다른 딸’인 ‘나’는 영영 비교의 대상이 되면서도 죽은 ‘당신’을 넘어설 수 없다. 그리하여 ‘당신’은 부재하지만 불멸하는 자이며,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의 끄트머리에서 탄생하는 대체품이다.
"난 외동딸이 아니었어요.
무에서 솟아난 또 다른 아이가 있으니까.
내가 받았다고 믿었던 모든 사랑은 가짜였던 거예요."
작가의 유년시절을 혼란에 빠뜨린 사건은 고장 난 테이프처럼 몇 십 년의 세월을 거치며 삶의 순간순간 끊임없이 복기된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기반, 부모의 사랑에 대한 신뢰마저 뒤흔들 만큼 강력한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것들이 사실은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내 위로 덧입혀진 다른 이를 향한 불멸의 사랑이었다면. 그들과 ‘나’의 침묵이 완전한 공백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어떠한 맥락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작가는 일생에 걸쳐 고민해온 이 문제를 탐구하며 진정한 ‘나’로서 존재하기 위한 글쓰기를 시작한다.
아니면 당신과 당신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기 위해
당신을 되살리고 다시 죽게 한 것일수도 있고요.
당신에게서 벗어나려고
죽은 자들의 오래 지속되는 삶에 대항해 투쟁하려고.
그리하여 작가는 편지를 쓴다. ‘나’의 존재에 덧입혀진 ‘당신’을 부르면서, 그러나 스스로를 향해서. 글을 통해 ‘당신’을 되살리고, 낱낱이 밝히고, ‘나’에게 스민 ‘당신’을 벗어나 오로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해서. 탄생의 순간부터 드리워진 ‘당신’의 그림자를 분리해내고,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서.
물론 이 편지에 적힌 ‘당신’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이 편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니다. 주소가 적히고 우표가 붙은 편지봉투가 아닌, 한 권의 책에 담긴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은 바로 독자들이다. 그렇지만 괜찮다. 아니,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읽지 않을 테니까요. 편지를 받을 사람은 다른 사람들, 바로 독자예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이지요.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편지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일요일에, 어쩌면 튀렝의 방에서 파베세가 자살했던 그날에, 나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책 속의 문장>
이 일을 이야기로 만드는 건, 60년 전부터 벽장 안에 처박혀 있던 필름을 꺼내어 현상하듯, 흐릿해진 경험을 끄집어내어 이야기에 끝을 내려는 것이기도 합니다. - 14p
해가 지날수록 나는 이 이야기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에 불과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아요.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언어들만 있을 뿐. - 20p
현실은 서로 배척하는 단어들이 만들어냅니다. 더/덜, 또는/그리고, 전/후,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삶이나 죽음 같은 단어들에 의해. - 60p
당신과 나에 관한 두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서와는 거꾸로 놓여 있습니다. 당신이 죽는 이야기 이전에 내가 죽을 뻔했던 이야기가 있거든요. 확실한 건, 상상하지도 못한 당신의 죽음에 대해 들었던 1950년 여름의 일요일을 내가 기억한다는 것이에요. 나는 이제야 훨씬 더 세밀하게 봅니다. 릴본의 방과 창 옆에 놓여 있던 부모님 침대, 그 바로 옆의 분홍색 나무로 된 내 침대를. 나는 내 자리에 누워 있는 당신을 봅니다. 죽은 아이는 나예요. - 35p
나는 당신이 죽었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죽은 것은 내가 글을 쓰도록 하기 위함이에요.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 39p
당신이 거기 있어요.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그들의 고통으로. - 47p
이 편지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심코 당신을 떠올려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평온하던 마음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마치 꿈을 꾸듯 이끼만 잔뜩 돋은 인적 없는 습지에서 걸음을 내딛는 듯하고, 단어들의 틈새를 헤치고 나아가 불분명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가야 할 것만 같아요. 내겐 당신을 위한 언어도, 당신에게 말해야 할 언어도 없으며, 부정적인 방식을 통해 지속적인 비존재 상태로 있는 당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감정과 정서의 언어 바깥에 있는 당신은 비언어입니다. - 60p
당신은 내 흔적에 얹힌 당신의 흔적을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지요. 당신에 대해 쓰는 건 존재하지 않는 당신 주위를 맴돌며, 남겨진 부재를 묘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당신은 글쓰기로 채울 수 없는 텅 빈 형체입니다. - 62
나는 그들의 고통 속에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재 속에서 살았습니다. - 64p
나는 내가 있었던 그곳에 당신을 데려다 놓을 수 없고, 내 존재를 당신의 존재로 바꿀 수 없습니다. 죽음이 있고, 삶이 있지요. 당신 또는 나. 나는 존재하기 위해서 당신을 부인해야만 했어요. - 82p
물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당신이 아닙니다. 당신은 읽지 않을 테니까요. 편지를 받을 사람은 다른 사람들, 바로 독자예요. 내가 이 편지를 쓸 때, 당신만큼이나 보이지 않았던 자들이지요.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 편지가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신비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당신에게 닿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여름의 일요일에, 어쩌면 튀렝의 방에서 파베세가 자살했던 그날에, 나 역시 수신자가 아니었던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 90p
[목차]
다른 딸 - 9p
'나와 당신' (추천사) - 93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