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경험한 아버지의 자살은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지나간 사건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한다. 소설가가 된 ‘나’는 그동안 자신이 시도한 모든 헤맴의 뿌리에 그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사건이 자신에게 이식한 것이 무엇인지 해명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구체적인 사실의 조각을 모으는 일이 만족스럽지 않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을 함께 경험한 어머니를 이 일에 동참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실의 자료들을 모으려 하지도 않는다. 반면 ‘나’는 구체성, 사실성 없는 이야기, 불완전한 기억에 의지한 상상이 지닌 허약함에 대해서도 인지한다. 이제 어느 쪽으로도 선택할 수 없는 ‘나’는 이 불행을 어떻게 써야 할까. 그것은 글쓰기에 대한 질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불행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것인지, 곧 삶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밀려오는 기억들 앞에서
소설 전반에 아버지의 죽음이 있되 사건은 소설의 핵심에서 멀리 있다. 화자는 그 시절을 더 완벽하게 기억하기 위해 그 시절 살던 고향을 찾아가 보기도 하지만 기억의 일이 복원도 복구도 아니라는 것만 확실해진다. 기억은 단지 그 사건이 실재했음에 대한 증거일 뿐, 회상이 불러내는 것은 ‘죽음의 현장’만이 아니다. 오히려 독자들이 보기에 화자의 행위와 그 행위가 촉발시키는 결과들은 죽음과 무관해 보이는 사실들이다. 화자는 무작위로 등장하며 소설의 흐름이 방해하는 기억들을 태연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떠올리는 것들이 자유롭게 떠오를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화자는 밀려 올 기억과 다가올 문장들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과정이야말로 그동안 자신을 억압해 왔던 ‘회피’에 대한 저항이라는 듯. 삶도 죽음도 보거나 보지 않는 결정만이 있을 뿐이라는 듯.
■ 내 기억의 박물관
『달력 뒤에 쓴 유서』는 가족 상실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자 공백으로 남은 한 시기의 자신을 찾아 나선 여행 소설인 동시에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메타 소설이기도 하다. 다층적인 작품의 특성을 반영하듯 다양한 언어로 표현되는 언어들은 소설의 흥미를 배가시킨다. 메모, 편지, 심문, 전화 통화, 대화 등은 내 기억의 박물관에 보관된 기록물들로, 특히 독백으로 남은 대화들이 보여 주는 공백의 미학은 이 소설의 분위기를 느슨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한다. ‘나’는 이 모든 기억들과 마주하며 이 소설의 도착지이자 한 비극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나’와 함께 남겨진 자, 어머니의 마음속이다. 어머니에게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이 소설의 2부는, 자신의 불행을 소설로 쓰는 일, 나아가 자신의 불행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한 최선의 결말이자 아름다운 결말이라 할 만하다. 독자들에게도 이 결말은 자신에게 다가올 생의 다음 문장을 위한 아름다운 2부가 되어 줄 것이다.
줄거리
학창시절 자살한 아버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그 시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상황을 해독하지 못한 채 성장해 소설가가 된다. 글 쓰는 삶을 후회하지 않는 한편, 좀처럼 자신의 소설에 만족하지 못하는 ‘나’는 지금까지 쓴 모든 글에 그 시절이 자리하고 있지만 어떤 글도 그 시절을 관통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업을 해결하려는 듯 이렇게 시작되는 글을 쓴다. “아버지는 오래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원하는 소설을 완성할 수 있을까. 완성된 소설이란 무엇일까. 과거를, 소설을, 마침내 세계를 직면하는 순간, 그가 쓴 글이 그를 쓰기 시작한다.
추천사
글을 쓴다는 건 자신을 파헤치고 또 파헤치면서 잠정적으로 찾아낸 답을 통해 계속해서 질문하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서술자를 따라 그가 경유해 온 타자들을,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지켜본다. 이해하고 나면 마침내 가닿게 될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문장을 읽게 될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혹은, 이미 가닿았을지도 모르고,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한유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