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서덕준, 더 깊어진 사랑의 언어
낙하 이후에도 서로를 감싸 안으며
끝까지 남아 있는 마음의 기록
서덕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함께 추락하러 왔어요』는 ‘추락’이라는 단어를 삶의 은유로 삼는다. 이 책에서 추락은 실패나 파멸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더 깊이 내려가는 감정의 방식이다. 무너짐을 감추지 않고, 불운과 상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도 끝까지 사랑을 말하려는 태도가 시집의 중심에 놓여 있다.
서덕준의 시 세계는 몸의 감각에 깊이 밀착해 있다. 계절의 질감과 자연의 숨결, 피부에 스민 감각의 흔적들을 따라가며 사랑의 여러 얼굴을 그려낸다. 예고 없는 풍랑에 휩쓸리는 순간부터 껍질 없이 먹먹하게 갈변해가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언어는 아름다움과 상처의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사랑은 궁전처럼 찬란하지만, 동시에 멸렬하고 처참한 감정이기도 하다. 이 모순된 감정의 진폭 속에서 시인은 “우리 이제 그만 내릴까?”(「눈물의 속력」 中)라고 묻고, “그래서 나는 펼치지 않기로 한다”(「패러슈트」 中)라고 답한다.
이번 시집의 또 다른 특별함은 16편으로 구성된 산문 파트에 있다. 가슴 깊이 묻어온 쓸쓸함을 나직이 고백하는 「선천성」 「어려운 10월」, 가족에 대한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긴 「시금치 무침」 「그 집」 「10월 20일」, 열병처럼 다녀간 사랑의 기억을 그린 「손목 통증」 「사랑의 불가항력」…. 선천적인 결핍과 반복되는 불운, 꺼내지 못한 말들에 대한 후회, 돌아갈 수 없는 품을 향한 그리움, 타인과 마음의 접점을 만들어가는 대화의 순간들이 시인의 목소리로 담담하게 펼쳐진다. 이 내밀한 이야기들은 일상의 파편이 어떻게 시의 밀도로 응축되는지를 보여주며, 그의 시가 단지 감정의 표출이 아닌 삶의 내력을 겹겹이 품은 기록임을 증명한다.
프롤로그에서 시인은 말한다. “이 책을 통해서 감히 함께 추락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함께 단단한 길이 되겠습니다.” 흙은 밟을수록 단단한 길이 된다는 시인의 말처럼, 무너짐은 곧 관계와 삶을 다시 이어가게 만드는 통로가 된다. 그의 시는 독자를 섣불리 위로하거나 슬픔에서 성급히 건져 올리려 하지 않는다. 대신 무너지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 자리에 함께 머무르자고 손을 내민다. 추락을 삶의 유일한 경로처럼 느끼는 순간에도, 서로의 존재가 끝내 길이 될 수 있다는 믿음. 『함께 추락하러 왔어요』는 시인이 오래도록 품어온 이 믿음에 대한 조용하지만 깊은 고백이다.
책 속에서
실패가 두렵지 않은 세계를 써볼게
사는 것에 증명 따위 필요 없는 그런
시로 지은 세계를 너에게 써줄게
_1부 「시로 지은 세계」 중에서
아픈 걸 견딘다고 삶이 참아지는 것도 아닌데
견딘다고 헐어버린 마음에 살이 돋는 것도 아닌데
왜 잔돌 무너지는 벼랑처럼 살고
웃는 것이 죄처럼 사는 거야 왜
_1부 「너 와락 죽어버리는 거 아니지?」 중에서
산안개를 등에 업은 숲은 엄마의 냄새를 걸쳐 입고 다시금 씨앗만 해졌다. 시금치 무침, 비로소 엄마가 해
주던 맛이 난다. 여섯 살 공원의 남쪽에서 나눠 먹었던 엄마의 맛. 엄마가 없이도 이제 엄마의 맛을 흉내 낼 수 있게 됐다. 근데 나는 그게 너무도 싫고 또 무서웠다.
_1부 산문 「시금치 무침」 중에서
그늘진 삶에는
남들이 모르는 나의 벼랑이 있지
작은 것들이 매일 무너지는 곳
파도가 치밀어 오르는 곳에
앉을 곳 없이 서성이는 내가 있지
_2부 「과습」 중에서
족히 서른 번은 훌쩍 넘게 살아왔음에도 10월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어쩌면 마흔 번 쉰 번을 겪어도 같은 실수로 가을이라는 경주에서 부정 출발을 계속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10월에서 조금은 알 것만 같은 게 생겼다. 남들보다 삶이 늦게 출발하는 것, 노력해도 떨어지기만 하는 것, 나의 값어치가 한없이 추락하고 마는 것들이 가을에는 미학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런 내가 죄나 잘못이 아니라는 걸.
_2부 산문 「어려운 10월」 중에서
나는 가장 크게 웃을 때 가장 우울하다. 즐거운 순간을 감히 도작하는 것 같다. 내 것이 아니면 갖지도 탐하지도 말라고 끈끈한 가난이 귀에 대고 끝없이도 말해왔다. 매일을 집에서, 길에서도, 물속에 얼굴을 담그고도 나는 삶이 징그러웠다.
_3부 「삶은 아름다워」 중에서
아무도 없는 망망한 태양계에서 오랫동안 사랑할 것들이 필요해요
억겁의 시간 동안 죽지 못하는 외로움이 외계로 충분히 웃자랄 수 있도록
나에게는 더 큰 슬픔이 필요해요
_4부 「필요해요」 중에서
고개를 들고 하늘의 빈칸을 보세요
그리고 그 빈칸에는 어떤 구절이 적히는지도요
나에게는 얼마나 많은 빈칸이 있나요
내 외로운 이름은 누군가에게 얼마큼 불렸으며
나는 얼마나 희미해졌나요?
_4부 「삶의 보색은 삶」 중에서
[목차]
프롤로그
1부. 실패가 두렵지 않은 세계를 써볼게
고요한 항해
등의 빈틈을 깁고
당신께 고맙다
시로 지은 세계
아카시아와 여덟 살의 엽서
너 와락 죽어버리는 거 아니지?
푸른 별에게
죽음에 불을 지른다고 죽음이 화상 입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비문
초여름 협주곡
아름답고도 다정한 식물들이여
산문 - 시금치 무침 / 그 집 / 천진난만 / 난로 청소
2부. 함께 추락하러 왔어요
하나 둘 셋
서른넷
과습
슬픔의 내성
장례와 전생의 밤
함께 길이 되러 왔어요
여름의 후렴구
직녀 교향곡
여름 과일
눈물의 속력
패러슈트
사랑을 오역하는 방식
네 죄는 너로 말미암지 않았다
겨울의 뒷문
산문_ 사랑의 불가항력 / 손목 통증 / 어려운 10월 / 10월 20일 / 음지 식물
3부. 우리는 여름 자두처럼 덥고 무르고 달고
감기는 외롭습니다
수상한 해변
물의 주름
마중
여름불
피난처
칠월
당신은 당신의 것
고마웠다
삶은 아름다워
맨발로 걷는다
휘휘
달리기
빨래
산문_ 선천성 / 로맨스 드라마 / 말에 대한 후회 / 대화 좌표계
4부. 겨울엔 사랑할 것들이 필요해요
겨울의 문장
집의 노래
꿈의 희극
나는 물가에 산다
잠의 껍질
눈물의 쓴맛
재봉틀보다 미싱
욕심의 반작용
꿈만 같은 꿈
필요해요
동행
삶의 보색은 삶
해피 벌스데이 투 미
산문_ 겨울의 질감 / 운문 / 혼자 잘 살아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