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서평]
■천 년 묵은 지네의 재탄생
전래동화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가 배삼식 작가의 숨결로 입체감 있게 재탄생했다. 오래 묵은 한을 풀기 위해 사람으로 둔갑한 지네가 사람을 이용해 지렁이와 싸우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금기를 깬 사람에게 때로는 벌이, 자신을 믿어준 사람에게는 금은보화를 준다는 다양한 갈래들이 있다. 하지만 배삼식 작가는 등장인물에 이름을 부여하고, 각 인물의 갈등과 사연에 귀를 기울인다. 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 토룡 대사의 입장에서 풀어낸 이야기는 서로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 몰입도가 높다. 도라지꽃처럼 파아란 왼눈을 가진 총각은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 못하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그때 만난 두 손 빠알간 각시. 둘은 자신들의 아픔과 결핍을 보듬으며 함께 살기로 한다.
총각은 왼눈을 반짝 떴지. 각시가 총각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네.
“안 무섭소?”
“응”
“안 징그러워?”
“응. 도라지꽃처럼, 청옥처럼, 가을 하늘처럼, 새파아란 게, 예쁘기만 한걸.”
각시가 두 손을 총각 앞에 쑥 내미네.
“내 손은 어때요? 무섭지요?”
“아아니, 예뻐.”
남녀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걸 하며,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산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담뿍 정이 든 둘에게 큰 시련이 닥친다. 오랜 시간 한으로 얽힌 천 년 묵은 지렁이 토룡대사가 나타난 것. 그는 총각에게 각시의 정체를 밝히며 담뱃진으로 먼저 공격할 방법에 대해 알려준다. 하지만 이미 각시를 자신보다 더 소중하게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대상이 지네여도 해치지 못한다. 지네 각시도 이런 총각의 마음을 알고, 자신과 토룡대사와의 얽힌 원한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결국, 지렁이와 지네의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고 그걸 직시하며 견뎌 내야 하는 총각은 목 놓아 엉엉 운다.
“슬프다! 슬프다! 지네도 슬프고 지렁이도 슬프구나! 돌고 도는 원한이 슬프구나! 모든 게 내 탓이구나! 내가 지렁이를 보지 않았다면 내가 지네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런 싸움은 없었을 텐데!”
그 울음 덕에 둘의 원한은 녹아 흘러내린다. 토룡대사는 간곳없고, 지네 각시는 점점 작아져 풀숲으로 사라진다. 총각은 지네 각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3·4 어구 말의 리듬을 타고 긴 서사시를 읽는 듯한 호흡이 더 잔잔하게 다가온다. 말에서 말로 전승된 우리 옛 동화답게 말이 주는 서사가 아름다운 책이다.
■ 한국 전통미와 절제된 현대미의 균형 잡힌 그림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현대적 변용을 우리다움에서 찾고자 했다.”는 김세현 작가는 지네 각시, 도라지 총각, 토룡대사의 캐릭터를 보다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로 표현했다. 먹과 백의 대비, 청과 적의 조화로 배경과 공간, 인물을 단아하고도 강하게 만들었다. 두꺼운 장지에 황토를 바르고, 먹과 호분으로 작업 후 채색했다. 한국적 미감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현대적 균형미를 잃지 않았다. 도라지 총각의 새파아란 눈동자, 지네 각시의 빠알간 손 그리고 미묘한 감정선의 표현 또한 인물을 정면 그대로 클로즈업하면서 과감하고 더 섬세하게 담아냈다. 지네 각시와 토룡 대사의 격렬한 싸움 또한 점, 선, 면, 색 그리고 기호와 상징으로 혼란과 폭발 치유의 과정을 보여 준다. 긴 글의 호흡을 맞춰 가며 때로는 쉬어 가며 때로는 감싸안아 이미지로 확장시킨다. 이야기 안 그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매력이 넘친다.
* 인증유형 : 공급자 적합성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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